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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개관

성경과 신학 (D.A. 카슨)

by 말씀공방 202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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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아이도 건널 수 있고 코끼리도 수영할 수 있는 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성경의 기본 메시지는 단순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성경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다 알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성경 연구에 매진한 고령의 신학자조차 자신이 성경의 표면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어느 것도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알 수 없다(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부분에 한에서는 진실로 알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과 전체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에게 어려운 관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면 어떤 종류의 연구가 필요할까? 적절한 연구에 몇 가지 기본적이로 상호 의존적인 분야가 포함되는데, 여기서는 크게 다섯 가지, 곧 주의 깊에 성경 읽기,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목회신학에 관해 언급할 것이다. 

 

주의 깊은 성경 읽기

'주해'(exegesis)는 주의 깊은 성경 읽기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단어다. 주해는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준다. 우리는 성경 읽기에 건전한 해석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다. 

 

좋은 성경 읽기의 기본은 바른 독서법에 있다. 훌륭한 독자들은 단어와 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며, 문장과 단락과 긴 단락이 종합되는 방식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성경이 여러 다양한 유형의 문학 양식 - 내러티브, 법령, 잠언, 시, 예언, 역사, 비유, 편지, 묵시록 등 -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본무의 흐름을 따라간다. 개별 단어와 어구들을 묵상하는 일은 언제나 가치 있지만, 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가 그 단어를 특정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좋은 주해가 지닌 최고의 표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경청'하게 하는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본문을 거듭해서 읽을 대, 이 질문들은 차츰 다듬어지거나 날카로워지며 바로잡히거나 불필요해진다. 

 

성경신학

성경신학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역사적이고 유기적으로 계시하셨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성경신학은 성경의 개별 책(예. 이사야서, 요한복음)과 선집들(예. 모세오경, 지혜서, 복음서, 바울서신, 요한 문헌)의 신학을 연구한 다음, 정경 안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주제들(예. '성전'이라는 주제가 몇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어 성경 전체의 '성전신학'을 완성해 가는 방식)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네 가지 사항이 필수적이다. 

 

1. 성경을 역사적 발전을 점진적으로 서술하는 문헌들의 모음집으로 읽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경 전체를 단번에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며, 성경 전체를 앞의 일부분에 대입해서 읽으며 구속사의 흐름에 있는 그 부분의 참된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경의 역사 자료를 연대순으로 재구성하며 그 순서의 신학적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 성경의 일관성 전제하기.

성경 저자들이 많지만 그중 신적 저자는 한 분이며, 그분은 결코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으신다. 성경신학은 하나로 묶인 모든 성경 본문의 통일성을 밝히고 분명히 표현한다. 

 

3. 본문으로부터(개별 책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들로부터) 귀납적으로 추론하기.

성경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각자의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자신들의 주제가 오로지 성경임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본문 자체의 범주 안에서 설정된 중심 주제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4. 성경 전체에서 성경 자체가 인정하는 신학적 연결고리 잇기.

이 작업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제들의 궤적을 성경 전체에 걸쳐 추적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성경 이야기의 흐름이 전환되는 시점에 초점을 맞추며, 특히 후대의 성경 저자들이 이전 시대 저자들을 참고했던 방식을 관찰하며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집중한다. 

 

역사신학

역사신학은 '과거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주해와 신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교리는 여러 세기 동안 특히 거짓된 가르침에 대응하여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역사신학은 주로 현시대보다 앞선 시대의 견해와 관련된다. 그러나 성경을 전 세계적으로 읽는 일, 다시 말해 세계 곳곳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무을 어떻게 읽는지를 관찰하는 중요한 과제를 포함할 수도 있다. 이는 그들(또는 우리!)의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더욱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사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는 우리를 편견에서 해방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연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생각에서 근거 없는 가정을 제거하며, 다른 이들이 오랫동안 무시해 온 잘못된 해석을 드려내고, 성경을 책임 있게 해석하는 일이 혼자 감당하는 과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책에 실린 주석은 본문을 해석하는 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역사신학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그 지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주석들은 주로 주해와 성경신학에 집중한다.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성경 전체는 특정 주제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 세계와 관련하여 무엇이 참인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당연한 사실을 말하자면, 조직신학은 조직적(체계적)이다. 조직신학은 논리, 질서, 필요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 조직신학은 성경 전체가 사고 체계 안에서 어떻게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조직적(체계적)이다. 조직신학은 흔히 진리를 하나님에 관한 교리(신론), 성경에 관한 교리(성경론), 인간에 관한 교리(인간론), 죄에 관한 교리(죄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기독론), 성경에 관한 교리(성령론), 구원에 관한 교리(구원론), 교회에 관한 교리(교회론), 종말에 관한 교리(종말론)와 같은 범주 아래 구성한다. 조직신학은 일반적으로 동시대의 세계와 상호 작용하고 그 세계에 말을 건네기 위해 체계를 설정한다. 성경의 내러티브를 소중히 여기고 성경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다양한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조직신학자도, 결국 '신적인 드라마'(theodramas)라 불리는 고도로 정돈된 구조를 가지고 작업을 이끌어 간다. 

 

성경의 통일성은 조직신학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만든다. 조직신학은 성경의 자료들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하지만, 결국 대안적인 세계관들에 도전해야 한다. 때로는 '기록된 자료들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일부 기독교 진리 체계가 많은 부분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성육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 및 인간의 책임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태도는, 잘못되고 위험하다고 밝혀질 수 있는 부정직한 조직신학을 낳는다. 정통신학은 성경 전체에 주의 깊고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나서 본문과 본문, 진리와 진리를 바르게 관련짓는 데 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을 견지한다. 조직신학의 특질은 그 기초가 되는 자료, 구성방법, 특정 정보를 배제하는 원칙, 적절한 언어 표현, 논리적이고 정확한 결론 등에 바탕을 둔다. 

 

목회신학

목회신학은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때로는 성경 자체가 그 물음에 명확히 답하며, 또 다른 경우 그 답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서 이끌어 낸 추론에 바탕을 둔다. 목회신학은 다른 네 분야(주해,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를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따라서 나머지 분야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위험이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반응에 어떤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목회신학은 문화, 윤리, 복음 전도, 결혼과 가족, 돈, 영혼의 치유, 정치, 예배등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문학적 구조

신학에 관한 이러한 다양한 접근법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숙고하기 전에, 성경의 문학적 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 '인간', '죄'등 각각의 주제 장으로 구성된 조직신학 저서가 아니듯, 성경의 개별 책들도 역사를 따라 엄격한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으며, 앞의 책이 끝나는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문학 양식, 곧 글의 종류 가운데 일부는 이 책의 '역사서 개론', '시가서와 지혜서 개론', '서신서 개론'등과 같은 글에 소개되었다. 성경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족보, 비유, 애가, 고백, 찬양시, 하나님의 신적 발언, 산상설교, 강론, 내러티브, 공식 문서 및 칙령, 우화 등 온갖 문학 양식을 발견한다(우화는 등장인물이 없이 동물, 식물, 기타 사물이 인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다. 삿 9:7-15 참조).

 

하나님은 이 모든 문학 양식과 그 밖의 것들로 이루어진 성경을 주심으로 그분의 섭리와 지혜를 펼쳐 보이신다. 각 양식마다 우리에게 호소하고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양성은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은 우리의 지성을 배양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즉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고, 묵상하게 하며, 마음속 이미지를 떠올리고, 기억하게 하며,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고, 저속하고 합당하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기뻐 뛰게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주해가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과 결부되는 방식을 탐구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완전한 지혜로 근본적인 텍스트인 성경을 눈부시게 다채로운 형태로 주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 연구는 지루하거나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훈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창조적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요한 하나님의 지성과 마주한다. 

 

상호관계

어떤 독자들은 이 연구 분야들을 '주해-성경신학-[역사신학]-조직신학-목회신학'과 같이 일직선으로 정렬하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역사신학에 괄호를 친 것은 역사신학이 성경신학에서 조직신학과 목회신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만 그 자체는 이 직선의 일부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주해도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일직선의 이론적 틀은 순진한 접근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해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주해에 영향을 끼치는 나름의 조직신학적 틀을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석학적 순환에 갇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연구 분야들 사이에는 피드백 회로 - 되돌아가서는 주해나 신학 방법을 수정해 주는 정보 회로 - 가 항상 존재한다. 이 회로 자체가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지는 않지만, 연구자가 좋든 싫든 관계없이 전체 과정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조직신학이 자신의 주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최종적인 통제 회로는 주해로부터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거쳐 조직신학과 목회신학까지 이어지는 직선이며,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뿐이다. 

 

주해와 성경신학

성경신학은 주해가 조직신학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중재한다. 이는 성경신학이 약속과 성취, 모형과 원형, 발전과 유기적 성장, 기대와 완성 등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주해와 성경신학 사이의 중첩은 신학 연구 분야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띈다. 둘 다 본문을 이해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성경신학은 주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해가 분석에 초점을 두는 반면, 성경신학은 종합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신학은 성경의 개별 책들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흐름 안에서 주해의 결과를 숙고한다. 주해는 성경신학을 통제하고, 성경신학은 주해에 영향을 끼친다. 

 

주해와 역사신학

고대의 신조와 주해 및 신학의 역사는 매우 귀한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이 성경 자체의 궁극적 권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신학이 없다면, 주해는 21세기의 의제들에 예속된 모호한 논쟁으로 전락하기 쉽다. 책임있는 주해는 이전 시대의 기독교 주해 및 신학과 씨름한다. 

 

그러나 부차적인 견해에서 지나치게 전문가가 된 나머지, 성경 본문 자체를 숙고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성경 해석사를 읽는 일이 성경 읽기의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주해와 조직신학

일부 연구자들은 자신의 주해가 본문의 의미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발견해 내며, 그런 발견을 바탕으로 자신이 조직신학을 정립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직신학이 주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나름대로 선호하는 성구 목록을 만드는데, 이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해석하는 제어 격자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해가 상충되는 이유를 상당 부분 설명한다. 이 문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 

 

1. 어떤 교회 전통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성경 진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다른 성경 진리들을 희생시킨다. 그 결과로 나타난 왜곡된 구조에 어떤 본문이 잘 '들어맞지'않는다면, 그것을 경시하거나 심지어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칭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 칭의를 접근하는 방식을 덮어 버릴 수 있다. 

 

2. 어떤 교회 전통은 성경의 모든 책을 통합하는 특정한 구조를 임의로 채택한 뒤, 그 구조가 몇몇 본문과 주제들을 자동적으로 분류하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또는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설명하도록 만든다. 보다 심각한 경우는, 성경 전체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의 조직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이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성경이 특정한 주제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 연구할 때(조직신학), 그 작업은 역사신학을 통합해야 한다. 조직신학이 어떤 부분에서 역사신학의 내용을 다루지만, 조직신학의 우선순위와 의제는 이상적으로(가장 결정적인 지점에서) 동시대에 말을 건넨다. 

 

성경신학과 역사신학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시대의 흐름을 의식한다. 성경신학은 성경 문헌들이 기록되고 수집된 시대에 초점을 두는 반면, 역사신학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성경 연구에 초점을 맞춘다. 즉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에 집중하지만, 역사신학은 중요한 인물들이 성경과 관련하여 무엇을 믿었는지에 집중한다. 성경신학은 역사신학과 상호 작용할 때 가장 잘 기능한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성경신학은 역사적이고 유기적이며, 조직신학은 상대적으로 비역사적이고 보편적이다. 성경신학은 성경 본문으로부터 귀납적 결론을 얻는 일에 전념하는 과정에서 성경 자체가 의제를 설정한다. 반면 조직신학은 성경 자체로부터 서너 단계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이는 조직신학이 성경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제기하지 않는 철학적·과학적 질문을 다루기 때문이다(이는 정당한 일이다). 이렇듯 조직신학은 다양한 신학 분야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다. 

 

주해와 성경신학은 성경이 이 두 분야의 의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부합된다는 점에서 조직신학보다 우위에 있다. 반면 조직신학은 총체적 통합을 강하게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해와 성경신학보다 우위에 있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보다 성경 본문에서 더 멀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문화적 영역에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참여한다. 어떤 면에서 성경신학은 주해 및 조직신학과 중첩되어 두 분야가 서로의 목소리를 보다 잘 들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 또한 조직신학은 한 사람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변형하려 한다는 점에서 정점에 이른 분야다. 성경신학이 오늘날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은 사실상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조직신학이 오늘날 중요한 이유는, 조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면 성경이 무엇에 관한 책인지에 대해 명철과 깊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신학과 나머지 분야들

목회신학은 사람들이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주해,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을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목회신학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실제적인 물음에 답한다. 목회신학을 독립된 분야로 다룰 수도 있지만, 성경이 단순히(또는 오로지) 지적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현명하다. 성경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실천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주어졌다. 실천적이지 않은 신학 개념, 곧 회개, 믿음, 순종, 그리스도를 따름,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기쁨 등에 관심이 없는 신학연구는 우스꽝스러움과 불경험 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나에게'의미하는 바를 성급하게 추구한 나머지, 우리 자신과 본문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성경의 역사적 특수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도 손상된다. 이를 피하려면 성겨의 각 본문을 읽고, 나름대로 깊이 숙고하고, 그것이 성경 전체에 기여하는 바를 파악하고, 그 진리가 우리 자신과 교회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권위 있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헤로운 자기 계시를 그 자체로 진지하게 이해라고 해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우리가 그분께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노력은 불충분하다. 물론 해석자는 해석 과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성경 본문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성경에 통달하려는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의 다스림을 받기를 갈망해야 한다. 언젠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께 자초지종을 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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